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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방향을 따라 낚싯대를 드리운 날, 움직이는 세계와 멈춰 있는 나

by nambj 2025. 5. 16.

낚시를 떠나는 아침, 나는 유독 바람을 많이 의식했다. 그날의 바람은 동풍이었고, 습기와 약간의 냉기를 품고 나뭇잎 사이를 스치며 지나갔다. 사람들은 낚시에서 바람의 방향이 조과에 영향을 준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런 현실적인 조언보다도 바람이 전해주는 말 없는 징조들을 더 오래 곱씹는다. 바람이 서늘한 날은 어김없이 내 마음도 차가워지고, 따뜻한 남풍이 불면 어느새 유년기의 어스름한 햇살이 떠오르곤 한다. 낚시가 단지 물고기를 잡는 일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 속에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있다면, 그날의 바람은 내게 무엇을 일러주려는 것이었을까. 텅 빈 도로를 달려 도착한 작은 둠벙, 잡풀 사이로 낚싯대를 드리우며 나는 이 바람을 곁에 두고 하루를 보낼 준비를 했다. 바람은 계속 불었고, 그 움직임은 마치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각인시켰다. 낚시는 멈춤을 배우는 일이라지만, 실은 낚시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움직임이다. 낚싯대는 멈춰 있고, 몸도 거의 움직이지 않지만, 시선은 찌를 따라 물결 위를 떠돌고, 마음은 줄을 타고 물속의 보이지 않는 세계를 더듬는다. 나는 바람이 내게 묻는 질문을 듣는 듯했다. "넌 지금 어디에 있니? 네 마음은 어떤 방향을 바라보고 있니?"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나는 더 오래 고요해져야만 했다.

낚시를 하며 흔히 잊는 것은, 세상은 늘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제 갈 길로 바삐 흘러가고, 내 존재는 마치 잔잔한 물가의 한 점처럼 작고 덧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작음이야말로 내가 진정으로 나일 수 있는 자리다. 내가 더 크고 요란했더라면 이 고요한 순간들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람이 풀잎을 스치고, 작은 벌레가 수면 위를 가르며, 멀리서 까치가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모든 소리는 삶의 배경음처럼 존재하지만, 나는 그 음들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이야말로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더 큰 소리, 더 분명한 메시지를 원하지만, 나는 이토록 작고 조용한 일상적 움직임 속에서 더 깊은 진실을 발견해왔다. 낚싯대 하나를 드리우는 일, 찌 하나를 응시하는 일, 물결 하나의 흔들림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일, 그 모든 사소함이 모여서 오늘의 나를 만든다.

바람은 방향을 바꾸었다. 동풍이던 바람이 서서히 남쪽으로 기울었다. 물결의 방향도, 찌의 각도도, 내 몸의 자세도 조금씩 달라졌다. 나는 이 움직임을 억지로 제어하지 않고 그냥 따라간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은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대응이다. 우리는 가끔 삶을 설계하고 지배할 수 있다고 믿지만, 실은 바람의 방향조차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 불가항력 속에서 나 자신을 유연하게 조율하는 것, 그것이 낚시를 통해 배운 삶의 태도다. 찌가 잠깐 흔들렸다. 나는 숨을 삼켰다. 입질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찰나의 떨림이 주는 긴장감은 그 어떤 극적인 순간보다도 깊고 날카롭게 가슴을 찌른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그런 ‘가능성’의 떨림 때문이 아닐까. 확정되지 않은 순간들, 여전히 열려 있는 미래,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삶. 그 모호하고 불안정한 세계에서 우리는 기대하고, 상상하고, 사랑하며 살아간다.

오후가 깊어지고 물가엔 그림자가 늘어섰다. 나무도, 풀도, 내 자신도, 모두가 그 그림자를 안고 있다. 나는 문득 내가 아닌 것 같은 나를 본다. 낚싯대를 들고 있으면서도 어쩌면 나는 내가 아니라, 과거의 어떤 기억일지도 모른다. 처음 낚시를 배운 어린 시절의 소년, 첫 이별을 마주하고 강가에 주저앉았던 청춘, 혹은 아버지의 침묵을 이해하려 애쓰던 중년의 나. 낚시는 그렇게 나를 수없이 되돌린다. 내가 누구였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찌를 바라보며 다시 되새기게 만든다. 그리하여 나는 알게 된다. 낚시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의 나를 되찾기 위한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과거를 되짚는 일이야말로 앞으로의 삶을 준비하게 만든다. 그러니 낚시는 회귀인 동시에 도약이다.

해가 저물 무렵 바람은 잦아들었다. 나는 낚싯대를 천천히 걷으며 오늘 하루의 사색을 함께 감는다. 물속에서 느리게 일렁이던 생각들이 나를 따라 밖으로 나온다. 나는 낚시를 마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유를 마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유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 다시 시작될 것이다. 다른 날, 다른 바람, 다른 물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