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었다. 계절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믿기엔 어딘가 머뭇거리는 공기였다. 그런 날엔 이유 없이 마음이 저릿해지고, 손끝이 예민해진다. 나는 그날도 늘 그렇듯 낚시터로 향했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건 아니었다. 붕어가 잘 잡힌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아니고, 좋은 자리를 미리 알아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무언가가 나를 그쪽으로 이끌고 있었고, 나는 별다른 저항 없이 그 흐름에 몸을 맡긴 것이다. 강변으로 향하는 길은 조용했다. 차창 밖 풍경이 멈춘 듯 흐르고, 나무들은 가만히 바람을 머금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낚싯대를 짊어진 채 걷는 뒷모습을 비춰줄 사람도 없었고, 오늘 하루 어땠는지를 묻는 목소리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날이었다. 그저 낚싯대를 세우고, 찌 하나 띄우고, 흐르는 시간에 나를 맡기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날. 자리잡은 강가에는 몇 개의 빈자리가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누군가 앉았다가 떠난 흔적 같기도 하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리 같기도 했다. 나는 그 빈자리를 지나쳐 조금은 외진 자리에 앉았다. 바람이 통과하는 방향이었지만, 묘하게 마음이 끌리는 곳이었다. 물 위로는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바람에 따라 흘러가는 그 물결은 마치 지나간 기억들을 연상시켰다. 내가 잊은 줄 알았던 얼굴들,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 그리고 끝내 부르지 못한 이름 하나. 나는 찌를 띄우고 미끼를 던졌지만, 마음은 이미 물 위를 흘러가고 있었다.
낚시는 늘 뭔가를 기다리는 행위다. 하지만 그것이 꼭 물고기여야만 하는 건 아니다. 어떤 날은 찌의 움직임보다 더 미세한 감정의 파장을 기다리게 된다. 예전엔 함께 낚시를 다녔던 친구가 있었다. 말수가 적고, 웃음은 더 적었지만, 그는 낚시터에서 만큼은 유일하게 내 말에 귀 기울여주던 사람이었다. 그는 조용히 나의 이야기를 들었고, 말없이 옆자리를 내어줬다. 그 친구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 몇 해 전, 아무런 인사도 없이 떠났다. 나는 장례식장에 앉아 그가 생전 가장 좋아하던 떡밥 냄새를 떠올렸고, 우리가 함께 밤을 새운 강가의 안개를 떠올렸다. 그 이후로 나는 낚시터에서 늘 빈자리를 느끼게 되었다. 아무도 앉지 않은 바로 그 자리에, 나는 늘 그의 그림자를 본다. 오늘처럼 바람이 불고, 물결이 일렁이는 날이면 더욱 또렷하게. 찌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아마도 바람에 의한 흔들림이겠지만, 나는 그 작은 진동에도 마음이 쏠린다. 그것은 단순히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다는 증거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놓치며 산다. 함께 보냈던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늘 지나서야 깨닫는다. 낚시터의 빈자리도 마찬가지다. 함께했던 사람이 사라진 그 자리는 언제나 침묵하고 있지만, 그 침묵 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풍경이 담겨 있다. 나는 그 풍경을 기억하고 싶다. 아니, 잊고 싶지 않다. 우리가 함께 웃었던 날, 함께 밤을 새우며 아무 말 없이 찌를 바라보던 시간. 모든 것이 고요했고, 모든 것이 충만했던 그때. 한동안 아무 움직임 없이 시간이 흘렀다. 물 위엔 가벼운 안개가 내려앉기 시작했고, 세상은 서서히 어두워졌다. 밤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낚싯대를 쥔 손을 놓지 않은 채,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 하나 없는 회색 하늘. 그러나 그 하늘조차도 위로처럼 느껴졌다. 내가 아무것도 낚지 못했어도, 오늘 이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 어떤 이는 잊히고, 어떤 이는 떠오르지만, 그 모든 존재의 흔적은 어딘가에 남는다. 그리고 나는, 그 기억의 자리에 나를 묻는다.
강가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누구의 발소리도 듣지 못했다. 이따금 지나가는 갈대 사이로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고, 멀리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고요 속에서 흘러갔다. 그 고요는 단순한 정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숨겨왔던 내면의 감정들이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과정 같았다. 그런 고요는 나를 맑게 하고,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누군가는 낚시가 지루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낚시만큼 복잡한 감정을 정리하게 해주는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다. 붕어를 낚기 위한 기다림이 아니라, 나 자신을 낚기 위한 시간. 그 고요 속에서 나는 또 다른 나를 마주한다. 시간은 흐르고, 어둠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나는 낚싯대를 거두며 조용히 인사했다. 물고기는 오늘도 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기다렸고, 기억했고, 생각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낚시란 결국 그런 것이다. 반드시 무언가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잃은 것을 돌아보기 위한 시간. 나는 빈자리 하나를 남겨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는 길, 나는 문득 생각했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빈자리가 될까. 그리고 그 자리에 앉은 누군가가 오늘의 나처럼 나를 떠올릴 수 있을까.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은 따뜻해졌다. 빈자리는 결국 기억의 자리이고, 사랑의 모양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밤이었다. 그렇게 나는 또 하나의 밤을 낚시터에 남기고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