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입질의 떨림
물가에 앉으면 나는 나 자신을 다시 읽는다. 누구도 들어주지 않을 말을 내 안에서 웅얼거리며, 지난 삶의 조각들을 낚싯대 끝에 매달린 채비처럼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물결 위에 햇살이 조용히 스미는 아침이면, 그 비늘 같은 반짝임 속에 과거의 나를 본다. 조용했던 어떤 봄, 어설픈 한 마디로 상처를 주었던 누군가의 얼굴, 돌이킬 수 없던 장면들, 떠나간 이들과 마주했던 침묵의 시간들이 물비늘에 실려 흘러간다. 낚싯대를 드리운다. 바람이 붕어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듯하다. 무언가가 스치는 느낌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러나 그것은 입질이 아니고 다만 내 안에서 불쑥 올라온 감정의 출렁임일 뿐이다. 감정은 입질보다 더 예민하다. 기다림의 시간에 감정은 더욱 선명해진다. 첫 입질의 떨림. 고요함이 사람을 다독일 것 같지만, 그것은 오히려 오래된 감정의 껍질을 조용히 벗겨낸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을 놓쳤는지, 누구를 끝내 잊지 못하는지, 그 모든 질문이 호수의 깊이처럼 가라앉아 있다가 낚싯대를 매개로 떠오른다. 나무 그림자가 물 위에 비친다. 물은 기억을 머금는다. 시간은 흐르지만, 물속의 그림자는 오늘과 과거를 한 화면에 겹쳐놓는다.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했던 첫 낚시 기억이 떠오른다. 아버지의 낚싯대 끝에서 흘러나온 흙냄새, 묵직한 입질,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건네주던 주먹밥 하나. 그때 나는 말없이도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세월이 흘러, 이제 내가 아버지의 자리에 앉아 있다. 똑같은 찌를 보고, 똑같은 수면 위에 사색을 던지며, 삶의 무게를 씻어낸다. 낚시는 내게 어떤 취미를 넘어선다. 그것은 나를 되짚어보는 시간, 마음의 구석을 정리하는 의식이며, 묵은 생각을 털어내는 하나의 명상이다. 바쁘게 살아온 날들, 의미 없이 지나친 순간들, 사랑을 주고도 잊힌 기억들, 모두가 물가에 모인다. 낚시는 그것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틈을 마련해준다. 손끝에 전해지는 작은 떨림, 찌가 살짝 흔들릴 때, 삶이 이토록 섬세한 균형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한다. 무심한 듯 집중하고, 집중한 듯 무심하게 시간을 흘려보낸다. 자연은 말을 하지 않지만, 그 침묵 속에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물소리, 바람소리, 새의 울음, 풀벌레의 떨림, 그 모든 자연의 소리가 내 안의 언어가 된다. 그렇게 자연과 나는 서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서로의 마음을 비춰본다. 물비늘 위에 기억을 흩뿌린다. 그것은 잊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억하기 위한 행위다. 잊지 말아야 할 순간들, 간직해야 할 표정들, 놓치지 말아야 할 감정들을 다시 떠올리고 조용히 마음에 담는다.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세상은 바뀌고, 사람은 늙어간다. 그러나 낚시터에서의 나는 늘 그 자리에 있는 듯하다. 변하지 않는 강가, 사철 변화를 알리지만 본질은 흐리지 않는 자연, 그리고 그 속에서 흔들리는 나. 낚싯대를 통해 물과 이어지고, 물을 통해 과거의 나와 이어진다.
시작이 주는 용기
누군가는 낚시가 지루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지루함 속에서 나를 만난다. 급하게 살던 도시의 걸음에서 벗어나, 이 느릿한 호흡 속에서 진짜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마음속에 감춰두었던 슬픔, 말하지 못한 그리움, 어렴풋한 설렘 같은 것들이 낚시의 시간 속에 녹아든다. 그런 감정들은 마치 붕어처럼 물속 어딘가를 유영하다가, 어느 순간 찌를 끌고 들어간다. 반응하지 않으면 흘러가버리고, 너무 조급히 챔질하면 놓쳐버린다. 그래서 낚시처럼, 감정도 느긋하게 기다려야 한다. 인생의 대부분은 기다림이다. 사람을 기다리고, 때를 기다리고, 스스로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법을 안다는 건, 인생의 반을 이미 이해했다는 뜻이다. 낚시는 그 기다림의 미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행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시간 속에서,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난다. 마음의 중심이 잡히고, 생각의 물결이 잔잔해진다. 그렇게 기다림 끝에 붕어 한 마리를 품에 안았을 때, 그것은 단순한 손맛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조우다. 시작이 주는 용기를 나는 알고 있다. 물비늘 위에 또 한 조각 기억을 흘려보낸다. 오늘의 나, 이 순간의 감정, 함께 있던 바람의 방향, 하늘의 색, 낚싯대의 그림자까지도 모두 기록처럼 남겨놓는다. 그렇게 나는 물가에서 또 한 번 나를 만난다. 사색의 끝에서 조용히 되뇌인다.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깊이 살아야 한다.’ 그렇게 낚시는 나를 단련시키고, 나를 치유하고, 나를 정돈한다. 그리고 매번, 나는 물비늘 위에 나를 띄워보낸다. 조금은 달라진 나, 조금은 가벼워진 나, 조금은 더 깊어진 나를. 그런 하루가 또 하나의 삶이 되고, 또 다른 낚시의 의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