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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처럼, 강둑 위에서 배운 것들

by nambj 2025. 5. 9.

물은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흐르는 물가에 앉아 인생의 많은 것을 배운다. 낚시는 그 물가에서 배우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며, 나는 그 가르침을 좇아 강둑을 따라 걷곤 했다. 이름 없는 시골 마을의 강줄기, 비포장길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갈대숲과 들판, 그리고 그 사이로 굽이쳐 흐르는 맑은 물은 어느 누구에게도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자신을 내어주는 방식으로 존재했다. 나는 그곳에서 물을 바라보았고, 물은 내게 아무 말 없이 삶에 대해 속삭였다. 낚시대를 들고 강둑 위에 앉아 있을 때면, 세상의 모든 시계는 멈춘 것 같았다. 시계 바늘은 더 이상 시간을 재지 않고, 오직 강물의 흐름만이 내 존재의 무게를 가늠해주곤 했다. 처음에는 단지 고기를 낚기 위해 이곳에 왔지만, 점점 나는 이 강가에 앉기 위해 낚시대를 핑계 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기가 잡히지 않아도 좋았다. 찌가 움직이지 않아도 좋았다. 물결 위에 찌 하나 띄워놓고 강바람을 마시며, 흐르는 강물의 표정을 바라보는 일은 무엇보다도 충만한 일이었다.

강물은 늘 흘렀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같은 곳을 흐른다 해도 물은 결코 같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어느 날은 햇살을 반사하며 반짝이고, 또 어느 날은 흐린 하늘을 닮아 회색으로 출렁인다. 바람의 결에 따라 조용히 미동하다가도, 갑자기 급류처럼 솟구쳐 오르기도 한다. 나는 이 강물처럼 살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나도 모르게 품게 되었다. 집착하지 않고, 머무르지 않고, 그저 주어진 길을 흐르며 제 길을 찾아가는 물. 아무도 물에게 방향을 묻지 않고, 물도 누구에게 묻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결국은 가장 낮은 곳으로, 가장 넓은 바다로 흘러가는 이 자연의 이치 앞에서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자존심을 내려놓게 된다.

그날도 나는 강둑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바람은 간간이 갈대를 흔들었고, 햇살은 수면 위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찌는 고요했고, 나도 그 고요 속으로 침잠하고 있었다. 오래된 기억 하나가 천천히 마음속에서 올라왔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나왔던 강가의 기억이었다. 그는 늘 말없이 낚시를 했고, 나는 조용히 그의 옆에 앉아 물만 바라봤다. 가끔 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웃었고, 나는 그 웃음을 어색하게 받아들였지만 왠지 모르게 따뜻했다. 아버지와의 그 짧은 시간들은 내가 물가에 앉는 습관을 들이게 한 씨앗이었다. 어느새 그가 떠나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물은 달라졌고, 계절도 변했지만, 나는 늘 그 자리에 그와 함께 있는 듯한 착각을 지니며 낚시대를 들었다.

강가에서의 시간은 흘러가지만 결코 낭비되지 않는다. 찌를 보며 흐르는 강물을 응시할 때,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한 겹씩 벗겨낸다. 세상과 부딪치며 쌓인 거칠고 뾰족한 마음들이 서서히 둥글게 깎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마음속 무게가 가벼워지고, 한숨 대신 숨결이, 조급함 대신 평온이 깃든다. 그래서일까, 나는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마다 이 강가를 찾곤 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엉클어졌을 때도, 무엇을 포기해야 할지 망설여질 때도, 사랑이 끝난 뒤 슬픔이 오래 머물렀을 때도, 나는 강가에 나와 찌를 바라봤다. 강은 내게 대답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서 나는 스스로 답을 찾아갈 수 있었다. 어쩌면 진짜 스승은 가르치는 이가 아니라 묵묵히 옆에 있어주는 이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은, 낚시도 하지 않고 강가에 앉아 종일 책만 읽은 적도 있었다. 물소리를 배경 삼아 시집을 펼치고, 때론 멍하니 수면을 바라보며 한 줄의 시를 오래 곱씹었다. 그 구절들 속에 내 삶이 겹쳐지고, 물 위에 비친 하늘 아래로 시인의 눈빛이 어른거렸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도 강물 같구나. 그 안에 담긴 감정들이 흘러가고, 기억들이 쌓여 침전되고, 때론 소용돌이치며 누구도 알 수 없는 깊은 곳을 품고 있으니. 그런 마음을 다루기 위해, 나는 강둑에 앉는 법을 배운 것인지도 모른다.

낚시는 어느새 내게 단순한 취미가 아니게 되었다. 그것은 삶을 견디는 기술이 되었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창이 되었으며, 말없이 나를 이해하는 방식이 되었다. 누군가는 낚시를 외로운 사람들의 취미라고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그 외로움은 사람들과의 거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외면하며 살아온 이들의 내면에서 비롯된 것이다. 낚시는 그 외로움과 마주 앉아 침묵을 배우는 예술이다. 찌 하나를 바라보며 수 시간 동안 묵묵히 기다리는 일, 그 단순한 행위 속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내면의 균열을 발견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는지를 알게 된다.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은 수면 위에 붉은 길을 그려내고, 갈대들은 고개를 숙인 채 바람을 맞았다. 나는 천천히 낚싯대를 접었다. 고기는 한 마리도 낚지 못했지만, 오늘 하루를 허투루 보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낚시를 통해 나 자신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 기분이었다. 강물은 여전히 흘렀고, 그 흐름 속에서 나는 잠시 멈추어 설 수 있었기에 더 고마웠다. 삶이란 결국 어디를 향해 가는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흘러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이 강가에서 배웠다. 그렇게 나는 또 하루를 물가에 남기고 돌아섰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그 흐름이, 그 침묵이, 그 기다림이 오래도록 머물렀다.